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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의 군산

가장 많은 학도병 희생된 도시 

2010-06-2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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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포화 속으로’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장에 나서 치열하게 교전을 벌인 ‘포항전투’를 시실에 근거해 영화로 만들었다. 군산의 학도병들도 그렇게 7월 14일에 모여 전선으로 떠났다.

◇ 학도의용군 활동

7월 13일 폭염 속에서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욕을 앞세운 군산학련 소속 학생들과 일반시민, 청년들이 군산초등학교에 모였다.

시민과 학생으로 구성된 학도의용군에 참가한 학생들은 군산지역 6개교 211명에 달했고, 어린학생들이 자의로 지원해 교복에 태극 머리띠를 두르고 훈련 한 번 받지 못한 채 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했다. 계급도 군번도 없이 어깨에 태극기를 둘러맨 학도병들은 국군 7사단 소속으로 포항전투와 하동전투 등에 투입돼 젊은 피로 조국애를 발휘했다.

7월 14일 군산초등학교를 가득 채운 의용군들은 국군 7사단 인솔병들의 통솔 아래 군산역으로 이동해 기차에 올라 전선으로 향했다.

당시 참전했던 학도병들은 8월 하순 포항전투에 참전했고 대부분이 최후까지 용맹스럽게 싸우다 산화했다.

특히 군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도병이 희생된 지역으로, 학도의용군 사망자수 1976명 가운데 군산의 학도병은 211명(10.7%)이 사망한 것으로 전쟁기념관 동판 전몰학도의용군 내용에 기록돼 있다.

◇ 지상전투

학도병들이 떠난 지 일주일도 채 못 된 1950년 7월 17일. 금강을 사이에 두고 장항에서 쏴대는 포성과 17일 11시 경에 흥남동 뒷산에 박격포탄이 떨어진 것을 기점으로 군산시민들은 전쟁을 실감했다.

갑작스러운 전쟁 상황에 놀란 시민들은 우선 전군도로를 따라 익산으로 피난 가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만 해도 수명의 전투경찰 대원들이 군산대 뒷산의 정상에서 기관총을 장치하고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18일에는 금강을 건너 군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이 장항에 집결하자 미군 제트기(일명 호주기)들이 장항제련소 일대를 폭격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7월 17일 아무런 저항 없이 군산에 진주한 인민군 부대는 2개 부대였다. 그 중 한 부대는 서천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나포를 거쳐 군산으로 들어왔으며, 또 한 부대는 논산, 강경을 거쳐 임피 방면으로 들어 왔다

그런데 이들의 진격이 너무도 갑작스럽고 신속해 성산면 지서의 경찰들은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에 집에도 못 들리고 남쪽으로 피신했다 한다.

이날 이후 군산은 두 달 동안 이른바 인공시대(인민공화국)를 겪게 된다.

군산에 진주한 인민군 주력은 인민군 제4사단의 병력 일부였는데 이들은 군산을 무혈 점령하고 동초등학교에서 부대를 재편성해 이리 전주 방면으로 진출했다.

당시 북한군의 모습은 모두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16~17세 가량의 어린 청소년들로 장총을 거꾸로 맨 소년병은 키가 작아 총구가 땅에 닿을 정도였다 한다.

인민군들은 군산에 소수의 병력만 남아 옥구 군산에 내무서(경찰서)를 설치하고 선전대를 동원해 일반 시민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의 우수성을 주입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수시로 사람을 모엿다.

또한 낮에는 미군 제트기(쌕쌕이)가 군산 시내를 비행하며 인민군이 모여 있는 해망굴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해 활동하지 않다가 밤만 되면 노력봉사대라 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동 가능한 사람을 모두 동원해 산허리에 사람의 키만큼 되는 참호와 벙커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또한, 이른바 지방 빨갱이라고 불리던 군산출신 공산당들이 앞장서서 지역 유지나 우익단체 협력자 및 공무원을 색출하여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살육을 자행하는 바람에 군산시민들의 두려움은 깊어만 갔다고 한다.


당시 우익인사들을 강금하던 장소는 구 형무소(현 금광동 삼성A)자리와 개정면 발산리 사마타니농장(현 발산초등학교)에 설치된 옥구 내무서였다.

옥구 내무서가 위치한 시마타니농장의 금고건물은 유치장으로 이용됐는데 지방유지와 우익 인사들이 수감돼 초만원을 이루었다

당시 군산 시민들은 인민군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갔는데 남쪽으로 멀리 간 사람은 별로 없고 주로 선유도, 오식도 등의 섬으로 많이 피난했으며, 어떤 이들은 당시 군산시내에서 떨어진 시골이었던 나운동 부곡마을(현 유원아파트)이나 수송동 축동마을(현 수송제일아파트 일대)의 친척집으로 피해 있었다고 한다.

9월13일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자 인공기간에 설치던 지방 빨갱이들은 자신들의 범죄 사실이 알려질까 봐 이성을 잃고 우익 인사의 집안 전체를 집단 학살하는 최후의 발악을 자행했다.

이때 학살이 이루어진 곳은 군산시에서 15개 동이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곳은 미제면 신촌리(64명 사망)와 수송동 축동마을(51명 사망) 그리고 성산면(21명 사망)과 형무소 옆 산골짜기였다. 전체적으로는 집단 생매장되거나 우물에 수장당한 민간인이 213명(유족회 통계)에 이르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 미군주둔

9월 30일 오전 11시경 미군 25사단 2연대 예하 1개 부대가 군산에 진출했다. 

미군들은 동초등학교에 주둔했는데 이미 인민군이 떠난 후여서 큰 전투는 없었고 성산과 대야 인근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수복 후 군산 지역은 공산당에게 집단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시신이 속속 발견돼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피의 살육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엔군이 들어오자 그동안 숨어서 생활하던 우익 인사들이 뛰쳐나와 좌익활동을 명목으로 무차별 집단 학살의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보복했다. 당시 월명산 기슭과 성산면 공동묘지 등이 대표적인 좌익 처형 장소였다.

불과 60년 전 군산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 군산장항이리지구 전투

군산과 장항이리지구 전투는 한국 해병대가 처녀 출전했던 곳이다.

1950년 7월초 천안을 점령한 북괴군 제6사단 13연대가 그 여세를 몰아 서해안을 우회해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때, 해병대 고길훈 부대(1개 대대 규모)는 7월 16일 군산에 상륙, 장항 북방으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해 북괴의 금강선 진출을 저지 격파하였고, 7월 20일까지 군산과 이리(현 익산) 방면에서 적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적의 남침을 저지했다.

◇ 군산의 피난민들

군산에는 전쟁 전, 북한에 공산주의자가 득세하자 우익인사들이 몸을 피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황해도 연평과 군산 간에 민선 형태의 큰 여객선이 왕래할 때라 이 배를 이용해 남하 했다. 그 외에도 북쪽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자유를 찾아 내려와 정착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월남자는 많지 않았고, 전쟁 당시에 군산에 거주한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이른바 2차 후퇴라고 하는 1951년 1.4후퇴 때 진남포에서 유엔군의 LST(상륙정)와 어선을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이때 군산에 상륙한 피난민은 총 5만여 명이었는데 그중 2만5000명은 김제, 부안, 익산에 배치했고 군옥 지방에는 2만5000명의 피난민이 수용됐다.

이 시기 군산의 인구가 8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전쟁으로 어려운 시절 갑자기 2만5천의 식구가 늘었다는 것은 군산으로서는 큰 변화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산에 온 피난민들은 주로 단체 수용생활을 했는데, 당시 수용소로는 가족 단위로 쌀을 배급해 주던 해망동 솔곳이 수용소와 부녀자와 어린이만을 수용하며 공동 배식을 하던 구암초등학교 난민 수용소 그리고 중앙초등학교 수용소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일본인이 놓고 간 유곽들과 큰 규모의 적산가옥에 피난민을 분산 수용했다. 그러나 모든 피난민들이 수용소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는데 많은 수의 피난민들이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산비탈에 움막을 짓고 생활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 군산의 시민들은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헌 옷가지 및 이불을 모았으며 굶는 아동들을 잠시 맡아 키워주는 구호사업을 벌여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냈다.

전쟁이 끝난 후 4~5년이 되자 공식적으로 수용소가 사라졌는데 피난민들 중 일부는 현 한사랑병원 근처와 수송동 새마을 동네에 집단 정착촌을 만들었으며, 이밖에도 해망동 산동네와 군여고 뒤편, 흥남동 산비탈, 나운동 신풍초등학교 인근 등에 모여 살며 굳센 생활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때 내려왔던 피난민 중에는 지리적 이유 때문에 황해도 사람이 가장 많았다.



편집국 (gsnews20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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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 제 군산사랑  2010-06-25 21:37:16
이기사 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이야기들를 정리해가면서 잊혀져가는 역사들을 군산뉴스가 많이 발굴해서 독자들에게 흥미롭고 좋은 기사로 앞장서가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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